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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團)은 유럽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나?

by 서구원 2015. 3. 3.
일본은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團)을 통해 유럽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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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유신(明治維新)과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團, )암창사절단, Iwakura Mission)

1868년 명치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외국에 인재를 파견하여 서양의 문물을 배워오도록 했다. 1871년에서 1873년 사이 파견된 이와쿠라시세츠단()岩倉使節団,  いわくらしせつだん, 사절단, Iwakura Mission)이 이들이다. 이와쿠라시세츠단은 1871년 9월 23일 요코하마에서 배로 출발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하였고 이후 워싱턴 DC를 거쳐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를 거쳐 돌아오는 길에 이집트, 아덴, 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를 방문하고 약 2년간의 여행을 마치고 1873년 10월 13일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명치유신 전에도 1860년에 미국에 한 차례, 1862년과 1863년에 유럽에 사절단을 두 차례 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 


메이지유신은 1999년 당시 오부치 게이조(小渕 恵三) 일본 총리는 국회 시정연설에서 메이지유신을 일본 제1의 개혁기로 부를 정도로 일본 역시 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 일본 총리는 21세기 일본의 국정목표 중 하나를 메이치유신때 외부세계에 개방하여 근대화에 성공한 사례를 바탕으로 '세계로 열린 일본'을 꼽고 있다.   

 

관련페이지

http://blog.daum.net/sfeelbug/8611200

 

일본은 유럽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프랑스 :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육군을 개선하기 위하여 나폴레옹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육군을 모델로 하여 두 차례(1872년 ~ 1880년, 1884년)에 걸쳐 군사사절단을 일본에 초청하였으며, 프랑스 육군 체제를 기반으로 1873년  전국적으로 징병 실시를 통해 서양식 군대를 창설하고 군사 학교와 무기고를 세웠다. 후에 1886에는 독일 프로이센 육군을 모델로 군사 제도와 조직을 개편하였다.

 

영국 : 일본 해군은 당시 세계 최고롤 평가받던 영국  해군을 모델로 하여 영국 고문단을 초청하고, 학생들을 영국에 파견하였다. 또한 일본의 주요 군함을 영국과 프랑의 조선소에서 제작하였다. 또한 일본은 영국의 도로교통시스템을 수용하여 자동차는 좌측통행을 하고 자동차 제작시 우측에 핸들을 장착하도록 하였다. 재미있게도 우측통행을 하는 나라는 영국을 비롯한 영국연방국가, 일본, 태국과 같이 입헌군주제를 시행하는 국가는 자동차가 좌측통행을 하며 핸들이 우측에 있다는 점이다.  길 한가운데로 가며, 마차가 올 때는 좌측으로 통행하도록 하였다. 1921년 12월 1일 조선총독부는 좌측통행을 하는 일본인들의 통행에 방해가 된다며 모든 사람과 차량들을 좌측통행하도록 하였으며, 이때부터 사람은 좌측통행, 자동차는 우측통행을 기준으로 하여 2009년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 때까지는 일본의 영향으로 좌측통행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해방 뒤인 1946년 4월1일부터 미군정청에 의해 차량이 우측통행하도록 변경하여 현재까지 우측통행전통이 내려오고 있다. 

 

독일 : 1889년에 공포되어 1890년에 시행된 일본제국의 헌법은 대일본제국헌법, 일본제국헌법, 또는 제국헌법으로 불리며 공포 당시의 메이지 천황의 이름을 따 베이지헌법으로도 불린다. 지금은 1947년 공포된 일본국헌법과 대비하여 그헌법이라고도 불린다. 1882년 이토 히로부미는 정부의 명을 받아 입헌군주제를 시행하고 있던 독일로 건너가 강력한 군주권을 기반으로 한 독일의 프로이센 헌법을 모델로 1889년 일본의 근대적 헌법인 '대일본제국헌법'을 공포하게 되었다. 

 

유럽(이태리, 네덜란드, 독일 등) : 일본은 이태리 네덜란드 등 유럽의 각국으로부터 건축기슬을 배웠다. 특히 1914년 독일 건축가 프란츠 발츠아와 일본인 辰野 金吾(타츠노 킨고)에 의해 완공된 동경역(도쿄역)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역(1984년)을 모델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1914년의 동경역은 2차대전 때 공습으로 파괴되어 1951년 재건하여 지붕의 모양이 차이가 있다. 동경역의 특징은 르네상스풍의 븕은 벽돌에 있다. 일본이 서양에서 배운 건축기술을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응용하여 많은 건축물을 세웠다. 대표적인 건물이 서울역(경셩역)으로서 서울역은 동경역의 축소판이다. 서울역은 일본인이 설계했으며 1925년 완공되었으며 건축가는 동경역을 설계한 일본인의 제자인塚本 靖 (쯔카모토 야스시)리가고 한다. 1995년과 1996년 사이에 철거된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건물도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가 1912년부터 사만시기인 1914년까지 기초설계를 하였고 이후 일본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 구니에다 히로시 등이 청사의 설계를 완성하여,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양식과 네오르네상스 양식을 융합하여 1926년 완공하였다. 1945년 부터 2012년까지 서울시청으로 사용되다가 현재 서울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성부청(京城府廳) 신청사(新廳舍) 역시 일본인들이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하여 1925년 기공하고 1926년 9월에 준공되었다. 

 

영국과 미국 : 일본은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철도, 조선 및 제철기술을 배웠다.  영국을 방문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리버풀의 조선소와 글라스고의 제철 공장 등에 감명을 받았으며 미국을 방문한 사절단은 로키산맥을 관통하는 철도와  피츠버그의 제철소를 보았다. 일본에서 철도가 시작된 것은 명치유신 이전인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1868년 1월에 미국 공사관서기관 포트맨에게 일본의 철도 부설권을 인정해 주었는데, 그 해에 막부정권이 무너지고,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 면서 영국 공사로 일본에 와있던 파크스가 일본 정부가 주도해야 한다고 권고하여 1869년 미국인에게 주었던 도쿄-요코하마 철도 건설권을 취소하고 일본정부가 직접 나서기로 결정했다. 일본 정부는 영국으로부터 외채 100만 파운드를 빌려, 그 가운데 30만 파운드를 1870년 3월부터 철도 건설에 투자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일본은 제1호 기차를 1871년 제작하게 되고 1872년 9월 동경(東京, 도쿄)의 신바시(新橋)와 요코하마(横浜) 구간 29km를 운행하였다. 2년 뒤인 1874년에는 오사카~고베(大阪~神戶)1877년에는 오사카와 교토(京都)사이에도 철도가 건설되었다.

 

미국은 이미 1830년대에 철도 건설이 시작되었고 1862년 최초의 대륙 횡단 철도를 건설을 승인하였고 로키산맥 너머 중서부와 태평양까지 뻗는 대륙횡단철도를 1869년 5월 10일 완공하였다. 철도석탄, 철, 철강 등 중공업을 부흥시키는 견인차역할을 하였다. 일본의 이와쿠라사절단은 1871년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안착한 다음 철도를 통해 로키산맥을 넘고 미시시피 대평원과 시카고를 지나 1872년 1월21일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또한 일본이 미국의 제철능력과 조선능력을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1919년 미국에서 유학을 했던 태평양 전쟁시 일본 해군 제독 야마모토 이로소쿠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야마모토는 피츠버그를 갔을 때 하루종일 자동차를 타고가도 제철소 굴뚝 연기만 보였다는 경험을 자서전에 썼다. 야마모토 이로소쿠(Yamamoto Isoroku, 山本 五十六, 1884 ~ 1943)는 태평양전쟁당시 일본 해군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眞珠灣攻擊, Attack on Pearl Harbor)의 책임자로 유명하며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한 일화도 유명하다. 미국의 경제력과 제철능력 등을 고려할 때 일본은 미국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야마모토는 1943년 미국 전투기에 격추되어 태평양전쟁 중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