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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영상-다큐멘터리(무료보기) : 독일 나찌 & 괴벨스(Goebbels)

by 서구원 2015. 1. 29.

교양영상-다큐멘터리(무료보기) : 독일 나찌 & 괴벨스(Goebbels)

 

나찌 선전술의 책임자 괴벨스(파울 요제프 괴벨스, 독일명 Paul Joseph Goebbels, 1897 ~ 1945)는 나찌저부의 '국민 계몽 선전부 장관(영어, Reich Ministry of Public Enlightenment and Propaganda, 독일어 Reichsministerium für Volksaufklärung und Propaganda, RMVP 또는 Propagandaministerium)'으로서 나치의 홍보를 조종한 사람이다. 나찌의 '국민계몽선전부"는 1933년 창설되어 1945년까지 활동하였다. 괴벨스는 선전술에 능하였으며 본인의 유창한 화술로도 유명하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죽은 하루뒤 벙커안에서 아내와 6명의 자녀들과 동반 자살하였다. 괴벨스는 대중매체인 라디오와 TV를 통해 정치 선전을 하였으며 정기적으로 TV방송을 선전 도구로 만든 최초의 인물로 기록된다. 

 

괴벨스는 1897년 농부출신의 할아버지와 노동자 출신의 아버지아래 세째로 태어났다.  

성장

그는 어릴 때 폐렴을 앓아 죽을 고비를 넘긴다. 폐렴으로부터 살아났으나 대신 몸이 허약해졌다. 또한 골수염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었다. 그의 가족은 그를 치료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수술 또한 실패로 돌아갔고, 그의 다리는 활처럼 굽어졌다. 그는 후에 그 굽어진 다리 때문에 친구들은 그를 놀렸고 괴벨스는 자기 자신을 열등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고, 내성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런 신체적인 결함을 지식으로 만회하려고 했기 때문에 후에 그가 지식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상급학교에 가서는 그런 성향이 더욱 더 강하게 되었는데 괴벨스는 상급 학교에서도 최상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 때문에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여러가지 도움을 청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는 그 과정에서 우월감을 느꼈다고 한다. 후에 그는 가톨릭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본·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에는 자기 자신을 항상 박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죽음

1945년 히틀러가 자살한 후 나치의 총리에 올랐으나, 이튿날 총리 관저의 대피호에서 부인 마그다 괴벨스와 자살하고 6명의 아이들(1명의 아들과 5명의 딸)을 독약을 먹여 같이 자살하였다. 그리하여 전쟁후에 남은 가족의 유일한 사람은 하랄트 크반트(Harald Quandt)였다. 하랄트 크반트는 마그다가 그녀의 전 남편 크반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는데, 1944년 전쟁 중 공군 중위로 이탈리아에서의 비행기 추락으로 부상을 당하고 적에게 붙잡혀 포로로 있었어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활동

1차 대전[편집]

1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에 그는 그의 조국을 위해 출정하여 전선에서 싸우기를 바랐다. 그는 그것을 1년 자원 복무 능력 증명서를 마련해둘 정도로 그 행동을 고귀하고 숭고한 행동으로 보았지만 그 증명서는 효력이 없게 되었고 그는 그저 대체 복무를 하게 되었을뿐이였다. 그는 전투원은 아니었지만 비전투원으로서 활약함으로써라도 소속감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전쟁 중에 그의 형제 한스가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혔고 그의 여형제 엘리자베트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 와중에도 그는 아비투어에 합격하여 진학하였는데 독일어 실력이 최고였기때문에 졸업사를 낭독하게 되었다. 졸업사가 끝난 뒤 교장은 그에게 유능한 웅변가가 될 재능은 가지고있지않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조국구호사업회의 행정병으로 소집되어 잠시 근무했었으나 상관들은 그의 다리와 군인답지 못한 외모를 보고 머지 않아 괴벨스를 다시 집으로 돌려 보내버렸다. 한편 괴벨스의 기대와 믿음과는 다르게 전쟁은 독일의 항복으로 끝이나고 괴벨스는 그 결과로 그의 신앙을 잃게 되었다.

2차 대전 전 정치 활동[편집]

1922년부터 그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을 관심 있게 보게 되었고 그 후로 부터 3년 후인 1925년 나치에 입당했다. 그는 자주 연단에 섰다. 1925년 7월 11일 바이마르에서 열리는 회의 전날 괴벨스는 처음으로 히틀러와 만나게 되는데 그 후로 그는 더 히틀러를 신봉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괴벨스는 당 지도부에서의 독재를 저지하기 위하여 독일 북서부의 나치세력을 결집하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국가사회주의 서한을 발간하였는데 그레고어가 발행인이 되고 괴벨스가 편집을 맡았다. 그들은 그 잡지로 인해 그들의 뜻을 히틀러에게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괴벨스는 히틀러와 자신의 뜻을 해명할 수 있는 대화 자리를 가지기를 원했는데 히틀러가 독일 북서부 나치를 순방하게 되었다. 11월 6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히틀러와 괴벨스가 두 번째 만남을 가지게 되었는데 괴벨스는 오히려 히틀러에게 완전히 매료 당하고 만다. 1928년 국회의원, 1929년 당 선전 부장으로서, 새로운 선전 수단을 구사하고 교묘한 선동 정치를 하여, 1930년대 당세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잡자, 국민 계몽 선전부 장관·문화회의소 총재로서 문화면을 완전히 통제하고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였다.

2차 대전[편집]

1939년 2차 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략으로 발발되었고 괴벨스는 국민들에게 분노를 심어 주기 위해 폴란드가 폴란드의 독일소수 민족들에게 잔혹한 행위들을 한다고 보도하게 하였다. 폴란드 침략중에 히틀러는 외무부의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에게 해외 선전을 맡겼다. 리벤트로프는 소련과의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었기 때문인데, 결국 리벤트로프가 괴벨스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얻기도 했었다. 괴벨스는 이 지시를 거부하며 무력화 하려고 노력했다. 그후로 리벤트로프와 괴벨스는 서로에게 큰 반감을 가지게 된다. 줄어드는 괴벨스의 권한을 다시 찾기 위해서 괴벨스는 고위 관료와 국장들을 회의에 소집해 각 담당자들에게 언론, 라디오, 뉴스 등의 선전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 괴벨스는 전쟁을 위해 국민들의 분노를 이용하기를 원했고 폴란드가 독일계 소수 민족들을 탄압한다고 보도하게하여 그 분노를 이끌어내었다. 폴란드를 점령한 뒤 히틀러는 서방의 강대국들에게 평화를 제안했다. 괴벨스는 영국의 답변을 기다리며 은근히 평화가 다시 찾아오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은 폴란드가 당한 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거절했고 히틀러는 평화의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하고 영국에 대한 선전을 괴벨스에게 지시하였다. 그에 따라서 10월 14일에 귄터 프린 함장의 독일 잠수함이 영국의 로열 오크호를 격침하여 883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그 즉시 괴벨스는 처칠이 시한 폭탄을 이용해 배를 침몰시키려했고 그 안의 수백 명의 미국인들을 익사시키려고했다는 등의 주장을 라디오 등의 매체를 통하여 그를 맹공격 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영국 국민과 영국의 지도자들을 분열시키는 선전 활동을 하였다.

 


괴벨스 총력전 연설  : 상영시간 1시간

https://www.youtube.com/watch?v=42sp-6Vmv9U

2차세계대전사 제33부 선전장관 괴벨스(EBS) : 상영시간 1시간

https://www.youtube.com/watch?v=LoC_bYFPy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