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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영상(무료보기) : 명치유신(明治維新, 메이지유신), 일본제국 다큐멘터리 - 이와쿠라시세츠단()岩倉使節団, 암창사절단)

by 서구원 2015. 1. 25.

교양영상(무료보기) : 명치유신(明治維新, 메이지유신), 일본제국 다큐멘터리 - 이와쿠라시세츠단()岩倉使節団, 암창사절단)

 

명치유신(明治維新, 메이지유신)

일본의 명치유신은 일본에 자본주의가 형성된 기점이 된 시기로서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M.C.페리 제독이 미국 대통령의 개국(開國) 요구 국서(國書)를 가지고 일본에 온 1853년부터 1877년 전후로 잡고 있다. 1853년 미국의 개국 요구이후 1854년 미 ·일 화친조약, 1858년 미국을 비롯한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의 통상조약 체결, 1866년의 300여 년 전통을 가진 막부가 폐지되면서 1867년의 왕정복고, 1871년 평민도 성을 갖게 된 사민평등, 1872년 학제 제정과 국민 교육 제도, 1873년 징병제와 정부 세수입을 위한 지조개정(地租改正), 태양력 사용과 서양의 7요일 제도 도입, 1877년 가고시마 대규모 반란(西南戰爭) 진압, 1881년 일본 최초의 정당 자유당창당, 1889년 메이지천황의 독일 헌법을 모델로 하여 만든 대일본제국헌법 공포, 1890년 제국의회 개설. 1890년 7월, 최초의 중의원 선거와 11월에 의회 개회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일본은 막부체제에서 천황제를 기반으로 한 근대적 통일국가가 형성하였다. 일본의 명치유신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노일전쟁, 1910년 한일합방,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미국 진주만(眞珠灣) 공격 등 태평양전쟁으로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는 등 외국의 침략을 유도하는 역할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외국과의 전쟁은 1945년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폭탄(原子爆彈)이 투하되는 비극을 자초하기도하였다.


마지막 사무라이 참조 : http://blog.daum.net/sfeelbug/8611200

 

이와쿠라시세츠단()岩倉使節団, 암창사절단)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점은 1868년 명치유신을 단행한 후 외국에 많은 인재를 파견하여 서양의 장점을 분석하여 일본에 적용하여 짧은 시일내에 서구의 수준으로 일본 시스템을 끌어 올렸다는 점이다. 1871년에서 1873년 사이 이와쿠라시세츠단()岩倉使節団, 암창사절단)을 파견하였는데, 이라쿠와세츠단은 일본 막부와 명치기간 동안 정치자문으로 활동하던 네덜란드 선교사 귀도 베르덱(Guido Herman Fridolin Verbeck, 본명 Verbeek, 1830~1898)이 러시아의 표트르대제(Peter the Great)가 1697년부터 1698년까지 서유럽으로 보낸 대사절단(Grand Embassy of Peter the Great)에 착안하여 제안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들의 임무는 미국, 영국 등 유럽 제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재협상하는 일과 교육, 과학기술, 문화, 군사, 사회, 및 경제구조 등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여 일본 근대화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첫째 임무는 대단히 수행하기가 어려서 상대국에 체류하는 기간이 늘어났지만, 둘째 임무는 성공했다고 할 만하다. 이들은 1871년 9월 23일 요코하마에서 배로 출발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하였고 이후 워싱턴 DC를 거쳐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를 거쳐 돌아오는 길에 이집트, 아덴, 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를 방문하고 약 2년간의 여행을 마치고 1873년 10월 13일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명치유신 전에도 1860년에 미국에 한 차례, 1862년과 1863년에 유럽에 사절단을 두 차례 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 

 

이와쿠라시세츠단()岩倉使節団, 암창사절단, いわくらしせつだん)은 특명전권대사 이와쿠라 토모미(岩倉 具視, 1825 ~1883)의 이름을 따서 이와쿠라시세츠단이라고 부르며, 당시 장관이던 부특명대사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 1830 ~ 1878),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 木戸 孝允 / 桂 小五郎, 1833~1877),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등 3)이 동행하였고 행정가와 학자들을 포함한 총 48명이 동행하였고, 이들과 함께 미국과 유럽에 파견되는 유학생 60명이 동행한 후 유학을 위해 남게되고 이들 유학생은 후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일본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다. 이 중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로 1841년생으로 일본의 개화파 선구자 요시다 쇼인(古田松陰)이 세운 슈카 숀주쿠(松下村熟)에 입학하였고 이곳에서 메이지 시대의 주역들과 교우관계를 맺었으며 영국으로 유학을 하게 되면서 영국에서 신문물을 보고 개화파로 전환을 하게 되며 1868년 메이지유신때 소장 개혁세력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40여년간 장관, 총리, 전권대사, 정당 총재, 추밀원 의장 등 정부 요직을 거치며 일본 역사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며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되어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2005년 7월 23일 열린우리당 당의장으로 있던 문희이상 열린우리당 서울시당 아카데미 4기 입학식 강의중
일본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명치유신은 112명의 개혁주체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그 중 제일 나이 많은 사람이 42살이었으며 제일 어린 사람은 17세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伊藤博文)였다고 설명하였다. 일본의 명치유신은 세계로 문을 열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와쿠라시세츠단이 총 112명으로 출발한 것을 두고 112명의 주체세력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이며, 이토 히로부미는 이와쿠라시세츠단이 출발하던 1871년 이미 30세로 명치유신의 주체중 가장 나이어린 17세라는 표현에는 착오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페이지

http://blog.daum.net/sfeelbug/8611200

 

영상감상(무료보기)

메이지 유신(명치유신)

http://www.youtube.com/watch?v=CLZtukiAuPk

 일본제국 다큐멘터리

 https://www.youtube.com/watch?v=t35PsGCuI3I

대국굴기 7화-백 년간의 유신(일본)

https://www.youtube.com/watch?v=WUyMgVNO82A

 일본경제를 알면 한국 미래가 보인다: 한양대 전영수 교수특강

 https://www.youtube.com/watch?v=lRvCCuBp_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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