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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레스센터(서울 태평로) 1층 : 서울신문,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한국언론진흥재단, 베델(배설 裵說), 양기탁 선생상

by 서구원 2015. 1. 1.

한국 프레스센터(서울 태평로) 1층 : 서울신문,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한국언론진흥재단,  베델(배설 裵說), 양기탁 선생상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시청사 옆에 위치한 한국프레스센터는 대한제국에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던 영국인 츨신 신문기자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 한국 이름 배설, 裵說)이 창간한 서울신문(서울新聞, 전신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과 언론진흥재단이 있는 빌딩으로 1층 중앙에 베델 사장의 흉상인 배설선생상과 당시 총무이던 독립운동가 양기탁(1871-1938)의 흉상인 양기탁선생상이 자리잡고 있다.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은 1909년 5월 1일 37세 나이로 한국에서 숨을 거두면서,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1909년 어니스트 베델이 서거한 후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5월 21일 통감부에 매수된되었으며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로 전환되었다.  해방을 맞아 1945년 11월22일 매일신보는 서울신문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한국프레스센터는 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던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의 사옥이 있었던 곳으로 1962년 정부가 서울신문 사옥 사들여 건립한 신문회관을 건축하였고 1985년 현재의 건문이 새롭게 건축되었다. 대한매일신보 원래 사옥은 현재의 서울시청 청사 자리에 있었으며, 1914년 목조건물로 새 사옥을 건축하여 매일신보와 경성일보가 입주하던 중 화재를 겪기도 했다. 1924년에는 총독부가 경성부청(京城府廳) 건립을 위해 양도를 요구함에 따라 현재의 프레스센터 자리로 이전하였으며, 1939년 경성일보와 같이 쓰던 건물 옆에 병도의 사옥을 지어 독립하였고, 해방을 맞아 1945년 11월22일 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이후 경성일보 사옥에는 코리아헤럴드가 입주하였으며, 서울신문 사옥은 1960년 4월19일 4.19시위대의 방화로 화재를 맞았다. 이후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59년 12월 신문회관 건립을 발의하였고, 1962년 정부가 공사 진행 중 중단된 서울신문 사옥을 매입하여 지하 1층, 지상 3층의 신문회관을 건립하여 사단법인 한국신문회관에 양도하였다. 1980년 들어서 프레스센터 건립이 구체화되었으며, 1981년 4월에는 한국방송광고공사가 언론공익사업의 일환으로 가칭 종합 프레스센터 건립을 계획하고, 5월 26일 건립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1982년 4월6일 기공식을 거쳐 1985년 4월6일 준공식을 개최하여 현재의 프레스센터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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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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